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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남자 "세조의 후손들에 내려진 저주, 절사손장자(絶嗣孫長子)"

문화/역사

by Chanu Park 2011. 8. 29.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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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김종서의 저주가 통한 모양이다. 원래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세조)의 후손들의 앞날이 그렇게 전혀 순탄치 못했다. 하기는 워낙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여 놓았으니. 세종의 수릉을 조성하며 지관 최양선이 예언한 절사손장자(絶嗣孫長子)의 업이 세조에게서 나타난 모양새랄까?

실제 당장 세조 자신부터가 말년에 문둥병으로 고생하다 죽은 데다가, 이미 단종이 죽던 그 해 적장자인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요절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의경세자에게는 이미 월산대군이라는 적손이 있었음에도 왕위는 둘째인 예종에게로 돌아갔다가 다시 예종의 적장자인 제안대군도 아닌 의경세자의 둘째로 월산대군의 아우가 되는 자을산대군이 물려받고 있었다. 이가 바로 성종이다.

원래 세조의 적손이었던 월산대군의 후손들도 처지가 어지간히 비참했었다.그나마 월산대군은 34년을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그리 일찍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승평부부인 박씨는 연산군과의 추문에 휘말리며 인수대비로부터 자결을 강요당하고 있었고, 장남인 덕풍군 역시 22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아니 심지어 덕풍군의 장자인 파림군마저 젊어서 요절했고, 차남인 계림군이 성종의 서자인 계성군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을사사화 당시 역모의 모함을 받으며 덕풍군의 가계는 이로써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한 마디로 세종의 적손이 손자인 단종에게서 끝났듯이 세조의 적손 역시 그의 고손자인 파림군에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손이 끊기고 말았다.

그러면 물을 것이다. 어차피 자식이고 손자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적장자니 장손이니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성리학 이전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주희가 성리학과 더불어 가부장적 질서를 강조하는 동기론을 내세움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장손의 존재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대를 잇는다는 것은 단순히 혈연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기가 혈연을 통해 이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는 장손을 통해서 가장 순수하게 이어지게 된다. 굳이 적통과 방계를 나누고, 서얼을 차별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론적 근거였다.

다시 말해 한 집안에서 장손이 끊겼다는 것은 기의 흐름이 단절되었다는 매우 무시무시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양녕대군이 굳이 세조로 하여금 세종의 적장손인 단종을 죽이도록 강요한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보복을 세종의 후사를 끊어 놓음으로써 철저히 보복한 것이었다. 그리고 세조 역시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성종으로 왕위가 이어졌으니 이후로는 평탄했는가? 성종의 장남이 바로 연산군이었다. 그리고 연산군은 아다시피 성종의 차남인 진성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나게 된다. 진성대군이 곧 중종이다. 그리고 중종의 적장자인 인종마저 3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지 불과 8개월만에 요절하는 불운을 맞게 된다.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은 순화세자를 어려서 잃었다.

명종의 뒤를 이은 것은 그래서 명종의 서형제인 덕흥군의 3남 하성군 균이었다. 선조다. 방계도 아닌 서자의 자손으로 그것도 3남이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더구나 명종의 고명조차 받지 못하며 선조는 이후 정통성에 대한 심각한 컴플렉스에 시달리게 된다. 선조 역시 서장자인 임해군은 품성에 문제가 있었고, 적장자인 영창대군은 너무 늦게 태어난 탓에 서형인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처지가 된다. 그나마 왕위를 이은 광해군은 아우인 신성군의 아들 능양군 인조에 의해 내쫓기게 되는데, 광해군의 장자는 위리안치되었다가 탈출에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었다.

인조의 장남이 저 유명한 소현세자다. 아는 바와 같이 소현세자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으로 볼모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그해 34살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아들인 석철과 석린 역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채 열 살도 되기 전에 죽고 만다. 또 한 번 인조의 장손이 끊기고 만 것이다.

효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평탄했다. 현종은 효종의 적장자였고 숙종은 현종의 적장자였다. 비로소 조선이 건국된 이래 세종-문종-단종에 이어 두번째로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정통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인종을 고려하더라도 무려 110년 6대만에 처음으로 적장자 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공교롭다면 단명한 인종을 제외하고 연산군이나 숙종이나 하나같이 계유정난과 관련하여 모종의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여러 차례의 사회를 통해 정난공신으로 이루어진 훈구파를 공격하고 있었고, 숙종은 단종을 신원하고 김종서의 후손을 등용하는 등 비로소 오랜 역사바로세우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명회의 묘가 파헤쳐지고 부관참시가 이루어진 것도 연산군 때였다. 공교롭지 않은가?

경종의 경우는 조금 예외이다. 그의 생모인 장희빈이 한때 왕비로 책봉된 적이 있었던데다, 공식적으로는 경종은 인현왕후 민씨의 아들로 입적되어 있었다. 하기는 그런 복잡한 사연부터가 이미 기구한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경종 역시 즉위 4년만에 후손도 없이 요절하고 만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무수리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 영조였다.

영조도 기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적장자 없이 후궁에게서만 효장세자와 장헌세자(=사도세자)가 태어났을 뿐인데 둘 다 왕이 되기 전에 요절하고 있었다. 그나마 장헌세자의 적장자가 정조, 그러나 정조 또한 적장자를 두지 못하고 후궁에게서 태어난 순조가 어려서 왕위를 물려받고 만다. 그러고 보면 어려서 왕위를 물려받은 순조를 정순왕후를 비롯한 노론벽파가 둘러싸고 정조의 업적을 철저히 파괴한 것은 단종 당시 세조가 했던 그것과 닮아 있다. 순조 역시 효명세자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죽고 헌종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역시 후손도 없이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손 강화도령 철종이었다.

고종은 더 복잡하다. 그의 선조는 인조의 4남인 인평대군이었다. 인평대군의 6대손으로 진사 이병원의 둘째아들이었던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군의 칭호를 받게 되었고, 그나마도 남연군의 4남인 흥선군에게서 차남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개똥이 고종이었다. 더구나 고종의 아버지는 호적상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로 되어 있다. 고종 역시 명성왕후 민씨에게서 태어난 장남은 어려서 죽고 그래도 차남인 순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역시 후손 없이 의문의 죽음을 맞고 있었다. 사실상 현재 남아 있는 대한제국 황실이 후손 가운데 정통성을 말할 수 있는 적통은 없다고 보면 된다.

참으로 수난이 많았던 조선의 왕가였을 것이다. 어째 장자계승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진 것이 문종과 단종, 인종, 현종과 숙종 뿐이었고, 서장자라도 장자가 왕위를 계승한 예조차 경종 한 번, 장손이 왕위를 이은 것이 정조와 헌종 두 번, 나머지는 그조차도 안 되는 경우들이었다. 마치 조상이 지은 죄를 후손들이 대신 받는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참고로 세종의 죽고 수릉을 쓸 때나 문종이 죽고 현릉을 쓸 때 풍수지리에 해박한 이들 사이에서 여러 안 좋은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수릉을 쓸 때는 최양선이라는 이가 후손이 끊기고 장자가 죽을 흉지라고 경고하고 나서고 있었고, 현릉을 쓸 때는 목효지라는 노비가 적통이 끊기고 방계가 잘 될 자리라며 반대하고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두 주장은 묵살되었다. 목효지는 먼 변방으로 쫓겨나고 안평대군의 책사 이현로 역시 이와 같은 비밀을 알고 있어 죽임을 당한 것이라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절사손장자가 단지 문종만이 아닌 세조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아니 세조가 죽고 수릉의 흉기를 막고자 당장 발복할 수 있는 명당에 오히려 태조보다 더 높게 릉을 쓰고, 더구나 예종에 의해 세종의 릉마저 다른 곳으로 옮겼음에도 이후로도 계속 세조의 후손들이 계속 수난을 겪은 것을 보면 단순히 묘자리때문만은 아니라 할 수 있겠다. 음택보다는 살아서 지은 음덕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것이니, 세조의 죄업이 후손에게까지 미쳤다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래봐야 지금 남아 있는 조선왕가의 후손 가운데 상당수는 세조의 후손일 테지만 말이다. 문종은 아들이라고는 단종 하나만을 두었고 단종은 자식도 보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당연히 모든 것은 상상이다. 단지 조선의 왕가가 이렇게 어렵사리 이어져 왔다는 것을 굳이 세조의 예를 들어 재미있게 풀어 쓰고자 했을 뿐. 하지만 그럴싸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한 나라의 왕가가 저리 오래도록 박복할 수 있는가. 대한제국이 구일본제국에 강제로 병탄되었을 때도, 그리고 해방되고 나서도 조선왕가의 수난은 끊이지 않았으니. 지금 당장도 조선왕가의 적통이 없어 방계 가운데 문중에서 뽑아 제사를 모시고 있다.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장 살아서 자기에게 돌아오는 처벌 때문만은 아니다. 자기가 지은 죄는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후손이란 피가 이어지는 것이 아닌 기가 이어지는 것인 까닭이다. 기에는 악기나 흉기도 포함된다. 조금은 마음이 경건해지는 이유다. 죄란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후손에게라도 돌아오게 된다. 냉엄한 인과의 법칙인 것이다.

하기는 그래서 세조 역시 말년에 자신이 저지른 죄업을 참회하며 불사에 공을 들인 것이 아니던가 말이다. 문둥병으로 고생하다가 재위 고작 13년만에 힘들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고작 그 영화를 보자고 그리 많은 죄를 지었던가 싶기도 하지만.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면일 것이다.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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