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세종, 문종이 가장 아낀 조선의 대호 김종서 장군

문화/역사

by Chanu Park 2011. 8. 29. 12:50

본문


김종서가 죽자 조선의 역사는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세종과 손을 잡고 조선의 북방 경계선을 넓혔던 대호 김종서. 젊은 선비들에게 태산북두로 추앙받은 문신이자 무신 못지않은 배포를 지녀 여진족을 벌벌 떨게 했던 김종서는 태종, 세종, 문종, 단종을 섬기며 역사의 현장에서 운명처럼 수양대군과 마주섰다. 무엇이 두려워 수양대군은 김종서부터 제거하려 했을까? 태종이 피의 숙청을 해가면서까지 막고자 했던 공신들의 나라는 왜 부활했는가? 수양대군의 가노 임어을운에게 철퇴를 맞고 쓰러질 때까지, 김종서의 삶과 죽음이 조선 역사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시대의 금기가 된 김종서와 굴곡진 조선 전기의 역사가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깨어난다.

역사대중화와 동시에 한국역사서 서술의 질적 전환을 이뤄낸 우리 시대 대표적인 역사학자 이덕일이 이번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종서의 일생을 통해 태종에서 단종에 이르는 조선 전기의 역사를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낸다.
김종서의 죽음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 계유정난은 왜 우리 역사의 비극이 되었는가?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은 그동안 우리가 4군 6진을 개척한 장군으로만 알았던 김종서를 보는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하며 김종서가 수양대군에 의해 철퇴를 맞고 쓰러졌던 계유정난, 그 뒤에 감춰진 진짜 비극이 무엇인지 그 핵심을 짚어준다.
저자는 이미 1999년에 김종서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10여 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저자는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자료, 새로운 현장 사진을 바탕으로 보다 촘촘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흡입력 강한 글을 써온 저자 이덕일은 이번 책을 통해 조선 역사 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한 인간의 삶을 때로는 진중한 역사로 때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내며 독자들을 14세기 조선 속으로 이끌고 있다.

태종, 세종,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현장에서 운명처럼 마주선 수양대군과 김종서. 수양대군은 왜 김종서부터 제거하려 했을까? 서른일곱, 연부역강한 수양대군이 일흔의 노인 김종서를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인가?

문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수렴청정을 할 대비도 없이 열두 살 된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왕위에 대한 수양대군의 야망은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어리지만 총명한 임금이 있고 이를 보필할 충직한 신하들이 있었기에 수양대군은 피의 숙청을 단행해 공신들을 제거했던 태종과 같은 명분을 가질 수 없었다. 수양은 단지 왕위를 탐내는 야심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계유정난이 일어난 1453년 10월 10일, 수양이 무사들을 모아놓고 거사계획을 밝혔을 때 그곳에 모인 무사들이 보인 반응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수양은 황보인, 김종서 등의 재상들이 어린 군주의 왕권을 제약하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거사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대의’ 운운하는 수양이 오히려 역적임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 이들은 수양의 거사를 국가의 위태로운 난리를 평정한다는 의미의 ‘정난靖難’이 아닌 ‘역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의 무리가 갑자기 대열을 이탈해 북문으로 도망갔다. 수양대군 측에 조금이나마 명분과 대의가 있었다면 도망가는 무사들이 나올 리는 없었을 것이다.

“계유년(단종 1)에 임금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대군大君(세종의 아들들)은 강성하니 인심이 위태로워하고 의심하였다. 황보인·김종서·정분이 삼정승이 되었는데, 종서는 지략이 많아 당시 사람들이 대호大虎라고 지목하니 세조(수양대군)가 그를 먼저 제거하려 하였다.”
-명종 때 문신 이정형의 《동각잡기》에 묘사된 단종 즉위 초의 모습

명분 없는 쿠데타를 일으킨 수양에게 있어 나라의 기둥인 김종서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단종 즉위 초 문종의 고명과 부탁을 받은 대신들과 집현전 학사들이 어린 임금을 보필했다. 이는 물론 단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운영되는 한시적인 체제였다. 삼정승 중에서 좌의정 남지는 병으로 휴가 중에 있었으므로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가 주도적으로 단종을 보좌했다.
단종 1년 8월 8일, 계유정난이 발생하기 약 두 달 전쯤의 《노산군일기》는 김종서에게 거의 모든 업무가 쏠려 있음을 보여준다. 영의정 황보인은 정부에서 의논할 일이 있어도 “영의정은 손님이오”라고 사양하면서 김종서에게 모든 일을 미루었기 때문에 홀로 출근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황보인의 겸양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김종서를 믿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어린 단종도 김종서를 믿었다. 쿠데타는 무력으로 일으키는 정변이었고, 이를 막는 것도 역시 무력밖에 없었다. 김종서는 문신이었지만 여진족과 몽골족 등의 준동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도체찰사를 맡아 북방으로 달려갔던 무장이기도 했다. 문文으로는 임금과 학문을 강론하는 지경연사이고, 무武로는 국경이 위태로울 때마다 말 타고 나아가는 도체찰사를 역임한 명실상부한 문무겸전의 대신이었다. 단종의 왕위를 노리는 자들이 대호 김종서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평생을 함길도로 평안도로 전선을 누볐던 김종서, 지방관들이 부임하지 않고 도망갈 준비를 하던 평안도에 기꺼이 도체찰사로 가 몽골군과 싸우기를 사양하지 않았던 김종서에게 기껏 사냥이나 다녔던 수양이나 한명회 등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오늘이 거사 날이니 그대들은 약속대로 움직이라. 내가 깊이 생각해보니 간당奸黨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 같은 자가 없다. 만일 김종서가 먼저 알게 되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두 역사를 거느리고 곧장 김종서의 집에 가서 그를 벤다면 나머지는 평정할 것도 없이 일은 성사될 것이다.”

수양의 이 말은 그가 김종서를 얼마나 큰 장애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태종이 피의 숙청을 해가면서까지 막고자 했던 공신들의 나라는 왜 부활했는가?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태종은 자신이 조선사의 불꽃을 피우게 하는 밑불의 역할이란 사실을 자각하고 핏빛 숙청을 통해 각종 공신으로 가득했던 조정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따라서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세종은 왕권을 위협하는 강신들이 없는 조정에서 안정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안정된 체제가 밑바탕 되었기에 세종은 북방강역을 확대하고 각종 문화사업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수양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세종이 발전시킨 정상적인 국가 체제가, 태종이 악역을 자처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으며 다져놓은 정상적인 국가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종이 피의 숙청으로 제거한 공신들의 세상이 계유정난에 의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수양이 되살린 공신의 수는 무려 2,300여 명이나 되었다. 심지어 정공신의 자제, 사위, 수종자들인 원종공신에게 줄 벼슬이 부족하자 우선 나이가 많은 사람에겐 일은 없이 녹봉만 타가는 검직檢職을 제수하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공신이 아니면 벼슬을 꿈꾸기 어려워졌고 백성들의 삶은 고달파져만 갔다. 1만 명이 넘는 공신과 그 가족들은 수양이 왕위를 꿈꾸지 않았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사회악이었다.
이들은 후에 훈구파가 되어 새로운 세력인 사림파와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고 이는 이후 ‘당쟁’의 시초가 된다. ‘당쟁의 역사’라고 표현하는 조선 중·후기 역사의 폐해가 바로 이 계유정난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김종서, 우리가 몰랐던 조선사!

김종서가 넓힌 북방강역은 어디까지인가?

세종은 재위 21년(1439) 3월 6일 공조 참판 최치운崔致雲을 북경에 보내 공험진 남쪽은 조선의 영토라고 통보했다. 명의 태조 주원장이 홍무洪武 21년(고려 우왕 14년, 1388) “공험진 이북은 도로 요동遼東에 부속시키고, 공험진 이남 철령鐵嶺까지는 그대로 본국本國(고려)에 소속하라”는 조서를 내렸다는 사실을 명나라 조정에 국서로 상기시킨 것이다. 고려 우왕 14년 요동정벌군이 북상하려 하자 명 태조가 공험진까지 고려 영토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은 공험진까지는 조선의 영토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공험진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였을까?
윤관이 ‘고려지경’이란 비를 세운 공험진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에 있었다. 함길도의 남쪽 경계는 철령이며 북쪽 경계는 공험진인데 그 거리가 1,700리이다. 조선 초기에 작성한 각종 지도도 공험진까지가 조선의 강역이란 인식으로 만들어졌다. 일본에서 발견된 조선 초기의 〈동국지도東國地圖〉는 세조 9년(1463)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이 제작했는데, 공험진 선춘령을 두만강 북쪽에 있는 속평강速平江(모사본에는 정평강定平江) 유역으로 그리고 있다. 속평강은 현재의 수분하綏芬下 및 목란강牧丹江 상류이다. 세종은 이 일대까지를 조선의 강역으로 확정했던 것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도 마찬가지로 기술하고 있으며 《북로기략北路紀略》 《북여요선北輿要選》 《북새기략北塞記略》 《북관기사北關記事》 《관북읍지關北邑誌》 등도 마찬가지로 공험진을 국경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일부 학자들과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윤관 9성의 위치를 길주 이남에서 함흥평야까지로 축소해 인식하면서 조선의 강역은 두만강 이남이라는 현재의 잘못된 지리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세종은 명나라에 공험진 남쪽은 조선의 강역임을 공식으로 통보한 후 김종서에게 공험진까지 강역을 확장하게 지시했다. 김종서가 세종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보고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종실록》 〈지리지〉를 비롯해 〈동국지도〉 등에 조선의 강역이 공험진까지로 그려진 것은 김종서가 이곳까지 조선의 강역을 확대했음을 말해준다. 두만강에서 선춘령까지 700리 강역은 조선 초기까지도 조선의 강역이었으나 조선 후기인들이 역사 강역에서 지운 것에 불과하다. 김종서는 조선의 강역을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까지 확장했던 것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자
김종서는 당대 제일가는 역사가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자도 김종서였다. 그러나 두 역사서에서 김종서의 이름이 삭제되었기에 김종서가 편찬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전하는 《고려사》의 가장 앞부분, 즉 〈고려사를 올리는 전문箋文〉은 이렇게 시작된다.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경연 춘추관사 겸 성균 대사성인 신臣 ‘정인지’ 등은 삼가 말씀드립니다. ‘신 등이 듣건대, 새 도끼 자루는 헌 도끼 자루를 표준으로 삼으며, 뒤 수레는 앞 수레를 거울삼아 경계한다고 하니 대개 이미 지나간 흥망의 자취는 실로 장래의 교훈이 되기 때문에 이 역사서를 편찬해 올리는 것입니다.’”
《고려사》의 주 편찬자는 정인지로 되어 있다. 그리고 편찬 날자는 문종 1년(1451) 8월 25일이다. 그러나 진실을 전해주는 것은 《고려사》 전문이 아니라 같은 날의 《문종실록》기사이다.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김종서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를 바치니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으로 되어 있었다.”
“신 등이 듣건대, 새 도끼 자루는 헌 도끼 자루를 표준으로 삼으며, 뒤 수레는 앞 수레를 거울삼아 경계한다고 하니…”라는 전문은 정인지가 편찬한 것처럼 되어 있는 《고려사》와 같다.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격살당한 후 ‘김종서’를 ‘정인지’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시대의 금기가 된 김종서
김종서는 《노산군일기》와 《세조실록》에 계속 역적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긴 자의 시각일 뿐이었다. 김종서의 공은 누구도 지울 수 없었다. 선조 16년(1583) 율곡 이이는 상소문에서 “김종서는 드러나게 탄핵받았으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여 6진을 개척하였습니다”라는 예를 들어 김종서가 6진 개척의 대업을 완수한 사실을 되새겼다. 인조는 재위 10년(1632) 청과의 충돌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자 함경감사 김기종에게 “옛날에 김종서는 아무것도 없는 땅에 창건하였는데, 지금 지키는 것은 이보다 쉽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김종서가 실제 역도였다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은 금기가 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는 물론 임금까지 그의 공적을 공공연히 언급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그를 역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종서의 공식적인 신원은 쉽지 않았다. 수양대군, 즉 세조의 후손들이 계속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세조의 직계인 예종(8대), 성종(9대), 연산군(10대), 중종(11대), 인종(12대), 명종(13대)은 물론 방계인 선조(14대)도 중종의 7남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로서 세조의 핏줄이었다. 광해군(15대)을 내쫓고 집권한 인조(16대)도 선조의 5남 정원군定遠君의 장남이니 세조의 핏줄이긴 마찬가지였다.
조선 국왕들의 이런 혈통 때문에 김종서의 신원은 두고두고 뜨거운 감자였다. 김종서의 신원은 자칫 세조 집권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죄였던 김종서는 결국 영조 22년, 그가 사망한 지 293년 만에 공식적으로 신원되기에 이른다.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밀어내며 수양이 건설한 조선은 공신들의 나라였다. 수양의 후예들이 계속 즉위하는 조정에서 김종서는 시대의 금기였다. 《고려사》 편찬자의 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진 것처럼 권력자들은 그의 이름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비정상으로 흘러도 진실은 그 스스로의 목소리로 살아남음을 역사는 말해준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