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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대군은 누구인가?

문화/역사

by Chanu Park 2011. 8. 29.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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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대군 이현, 예종과 안순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한명회의 딸로 세자빈 시절 사망한 장순왕후 한씨 소생의 인성대군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예종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9대 왕이 되었을 왕자다. 예종이 즉위 14개월만에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4살.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였지만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반대로 왕위는 덕종의 아들 자산군에게 돌아간다.

역시 왕의 장자였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한 양녕대군은 순전히 그 자신의 비행으로 폐세자 되었고, 그 후에도 숱한 악행을 저지른 탓에 백성들로부터 동정여론도 얻지 못했지만 세종은 제위기간 내내 양녕에 관한 문제로 신하들과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성종의 형 월산군은 왕실의 행사를 제외하면 평생 몸을 바짝 숙이고 시를 즐기며 소일했지만, 신하들은 그를 틈틈히 그를 물고 늘어졌고 사람들과 별다른 교류도 없이 살다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순전히 자기 잘못으로 쫒겨난 양녕이나 평생 조용히 지냈던 월산군이 그 정도였으니, 별 문제도 없이 왕이 되지 못한 제안대군은 더욱 시끄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안대군은 아무도 그가 왕위를 찬탈할거란 생각을 하지 못한 덕에 왕실 어른 대접을 받으며 천수를 누렸다. 

명종 때 어숙권이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제안대군의 일화가 실려있는데  

제안대군 이현은 예종 대왕의 아들로 성품이 어리석었다. 일찍이 문턱에 걸터앉아 있다가 거지를 보고 그 종에게 말하기를, “쌀이 없으면 꿀떡의 찌꺼기를 먹으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 한 말과 같다. 

여자의 음문은 더럽다 하여 죽을 때까지 남녀 관계를 몰랐다. 성종은 예종이 후사가 없음을 가슴 아프게 여겨 일찍이 “제안에게 남녀 관계를 알 수 있게 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 하였더니, 한 궁녀가 자청하여 시험해 보기로 하고, 드디어 그 집에 가서 밤중에 그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의 음경을 더듬어 보았더니 바로 일어서고 빳빳하였다. 곧 몸을 굴려 서로 맞추었더니, 제안이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물을 가져오라 하여 자꾸 그것을 씻으면서 잇달아 “더럽다.”고 부르짖었다.

 “일찍이 제안이 여자를 5ㆍ6명을 데리고 문밖에서 산보하는 것을 보았는데, 한 여자 종이 도랑에서 오줌 누는 것을 제안이 몸을 구부리고 엿보고서 말하기를, ‘바로 메추리 둥지 같구나.’ 하였는데, 그것은 음모가 무성한 것을 이름이다. 

-패관잡기-

저자는 이 일화를 소개하며 '혹자는 제안이 몸을 보전하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했다고 하는데 남녀 사이의 욕망은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인정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평생토록 여자를 더럽다 하여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실로 어리석은 것이다.' 하여 제안대군은 진짜 어리석은게 맞다고 진술한다. 

진짜로 성관계를 몰랐겠냐만은 그가 좀 모자란 면이 있었고 당대 사람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건 분명해 보인다. 1470년 5세의 나이로 제안대군에 봉해졌고 세종의 7번째 아들인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적된다. 12살 때 사도시정 김수말의 딸과 약혼했는데 아내 김씨가 또 건강에 문제가 많았다.

혼인한 이듬해인 1478년 6월부터 풍병을 얻어 간혹 현기증을 일으키기도 하고 두 다리가 연약해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되어 사가에서 병을 치료하게 했지만 영 차도가 없어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정신착란까지 일으켰다.

시어머니 안순왕후도 속이 터졌고 제안대군 본인도 부인을 몹시 미워해 남이 상처(喪妻)했다는 말만 들으면 "대체 김씨는 언제 죽는건가?" 하며 노래를 부르고 제발 헤어지게 해달라고 떼를 써서 결국 성종은 둘의 이혼을 허락한다. 14살에 마누라 죽으라고 천지사방에 노래를 부르고 돌아다니다니. 나름 비범하다고 할 수 있다.

성종 112권, 10년(1479 기해 / 명 성화(成化) 15년) 12월 20일(신미) 10번째 기사

정승 등에게 제안 대군의 부인을 폐하라고 전교하다

(중략)


전일에 덕원군(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의 맏아들)이 내 앞에 있다가 갑자기 중풍증을 만나게 되어서 곧 부축하여 나갔는데, 두 다리가 땅에 드리워져 끌렸지마는 침질을 하고 뜸질을 해서 곧 낫게 되었다. 대저 침질과 뜸질은 병을 치료하기가 쉬운데도 부인의 병은 유독 낫지 않으니, 다시 나을 수 없는 것이 명백하다. 또 왕대비께서는 보통 때에도 병환이 많아서 음식을 능히 소화하지 못하여 혹은 위로 토하는 때가 있기도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손자가 있기를 바삐 기다리고 있는데, 다만 왕대비만 이와 같을 뿐 아니라 대비의 뜻도 이와 같으니, 이를 폐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김씨의 외할아버지인 유수는


부인이 전년 6월부터 신의 집에 나와 있으면서 동산(東山)을 구경하고는 더위를 먹고 병을 얻었는데, 신이 마음을 다하여 간호해 모셨으나, 중병이 될까 염려되어 침질과 뜸질까지 하여서 지금은 이미 나았습니다. 발을 조금 절뚝거리는 병이 있어서 걸음을 걷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마는, 정신이 흐리멍덩한 증상은 젊을 때부터 없었습니다. 매양 나인이 와서 물을 때마다 보모가 사실대로 알리지 않았으니, 신은 그윽이 마음이 상합니다.

해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성종은 오래된 병이 있다고 미리 아뢰지 않은 유수의 실수라 하고는 대왕대비까지 거론하며 이혼을 명한다.


성종 112권, 10년(1479 기해 / 명 성화(成化) 15년) 12월 21일(임신) 6번째 기사

승정원에 전교하여 제안 대군의 부인을 폐하고 이를 외조부 유수에게 전하게 하다
(중략)

소원대로 이혼에 성공한 제안대군은 얼마 후 박중선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박씨와의 결혼생활도 전혀 순탄하지 못했다. 모자란 남편에게 정을 못붙인건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부부간의 금슬은 좋지 못했고 제안대군은 전처 김씨의 집을 찾기 시작한다.

1482년 5월 제안대군이 김씨와 사통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사헌부에서 김씨의 여종을 국문하여 ‘지난 정월 14일에 대군이 집에 이르러 바로 김씨의 침방에 들어가서 유숙하고, 다음날 아침에 평원 대군의 집 앞의 어떤 집으로 가서 사람을 보내어 김씨를 맞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는 진술을 얻어낸다. 전처를 못잊어 이혼 3년 만에 다시 찾아가 사랑을 나눈다. 당시 제안대군 나이가 17살이란 것만 빼면 딱 아침드라마 소재다. 이런걸 보아 패관잡기에 기록된 것처럼 남녀관계를 몰랐을거 같진 않다.

성종은 김수말을 추국하고 둘은 다시 이혼하도록 조치를 취한다음 처벌을 논의했으나 성종의 배려로 제안대군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있다 또 사건이 터진다. 같은 해 6월 11일 제안대군의 처 박씨가 내은금, 금음덕, 둔가미라는 계집종 셋과 동성애 행각을 벌였다는 진술이 나와 일대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내은금은 '부인과 5월부터 동침했으며, 하루는 부인이 내은금을 위하여 곡(曲)을 지어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 뜻이 내은금이 없으면 그리운 생각이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진술했고

둔가미는 '부인이 밤에 잠자는데 오기에 내가 더럽다는 것으로 사양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네 사내의 흔적이 네 몸에 붙어 있느냐?’ 하며 (중략) 이달 초6일 밤에는 내은금과 함께 자는 것을 유모 금음물이 부인의 집 종 녹덕을 데리고 등불을 밝히고 들어와서 이불을 걷고 함께 보았습니다.' 라고 진술을 했는데

박씨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계집종들이 자신을 욕보이려는걸 자신은 필사적으로 거부했으며 그녀들이 자신을 어떻게 욕보이고 누명을 씌우려 했는지 세세하게 진술했다. 6월 18일의 국문을 거쳐 박씨의 결백이 증명되어 계집종들과 이를 방조한 이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지만 제안대군과 박씨의 사이는 이미 수복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진 뒤였고 그해 12월 12일 박씨는 불손하다는 이유로 이혼을 명받는다.

이듬해 5월 29일 제안대군은 전처 김씨랑 혼인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내 마누라는 언제 죽냐고 제발 이혼하게 해달라고 우길땐 언제고 이제와 다시 결합하게 해달라는 요청에 기가 막힌 성종은 제안대군의 그간 행실과 나이든 왕대비까지 거론해 말렸지만 제안대군이 김씨와 재결합시켜 주지 않으면 평생 혼자 살겠다고 우겨대니 성종은 둘의 재결합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제안대군은 김씨와 평생을 함께 살았고 연산군, 중종 때에도 왕실의 어른 대접을 받으며 부유하게 살다 1525년 60세로 숨을 거둔다.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왕위계승이 유력했다 탈락한 왕족치곤 이례적으로 순탄하고 행복한 삶이었다.

이렇게 되니 불쌍해지는건 박씨와 안순왕후 뿐. 시집 잘못간 죄밖에 없는 박씨는 이후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1469년 젊어서 과부되고 지독한 위장병에 걸려 음식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던 안순왕후는 효성은 지극했으나 모자란 아들과 며느리 때문에 1498년 죽을 때까지 그토록 원하던 손자얼굴도 보지 못했고 예종의 핏줄은 끊어졌다. 

제안대군은 연산군과의 관계가 특히 좋았는데 이는 제안대군이 연산군의 외로운 마음을 잘 헤아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제안대군은 왕위 계승에서도 밀렸을 뿐 아니라 모후인 안순왕후도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보다 서열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수대비가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에게 크게 인식된데다가 인수대비의 카리스마에도 눌려 제안대군의 어머니인 안순왕후도 왕실에서 큰 자리를 잡지 못하여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니 연산군은 제안대군의 사정을 보고 자신과 동병상련을 느껴 다가갔다. 자신은 물론 연약한 어머니의 운명까지 닮았으니 연산군은 자연히 제안대군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비롯한 이복 형제들로부터 혈육의 정을 느꼈을 리는 만무하다.

제안대군은 연산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풍류를 즐기면서 '장녹수'를 만나게 했지만, 제안대군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냈다기 보다는 그저 조정과의 실랑이로 인하여 망가져가는 조카 연산군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다가감으로서 연산군은 이러한 제안대군의 배려를 알고 고맙게 여겼다고 할 수 있다.

연산군이 폐위된 후에도 제안대군은 왕실의 어른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결국 중종 20년에 사망하게 된다. 즉,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천수를 누리다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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